뜨거운 얼음.

배우 박해수는 이 수식이 단숨에 납득 가능한 연기를 보여준다. 고전의 재해석으로 입소문 난 호주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LG아트센터와 손잡은 연극 '벚꽃동산'에서 그는 연약함이 깃든 상처 입은 맹수처럼 보인다.

감정적으로 뜨겁게 설득하지만, 실리적인 측면엔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뜨거운 김을 내뿜는 불도저처럼 일을 밀어붙이지만, 그 내면은 금방 녹을 듯이 유약하다.

스톤은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어울리는 고전 텍스트라 판단했다. 원작은 벚꽃동산을 잃게 된 여주인의 현실을 통해 지주 계급의 몰락을 다뤘다.

이번 연극은 한국재벌이라는 계급을 통해 완벽한 'K-패치'를 선보인다. 본래도 '막장 드라마' 요소가 있지만 거기서 삶의 불편한 본질을 불안한 미학으로 승화하는 체홉의 아우라가 살아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드라마로 재탄생했다. 이 덕분에 지난달 4일 개막해 오는 7일 폐막을 앞둔 이 작품은 갖가지 화제를 낳으며 연이어 매진사례를 기록했다.

원작 '벚꽃동산'에서 로파힌은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부를 일군다. 이 캐릭터는 스톤·LG아트센터의 '벚꽃동산'에선 아들에게 폭력적인 운전기사 부친을 둔 '황두식'으로 변주된다. 그 역시 극 중 재벌인 송가(家)네 명예와 부동산을 거머쥐는 신흥 부자다. 박해수가 황두식이다.

황두식은 배우 전도연이 연기한 재벌 3세 '송도영'으로부터 어릴 때 위안과 희망을 얻지만, 그것이 그녀의 호의가 아닌 일종의 습관이라는 걸 깨달은 뒤 차츰차츰 현실적으로 변한다.

그런데 박해수의 황두식은 다른 배우들과 연기톤이 다소 다르다. 홀로 더 연극적이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수리남' 등을 통해 매체에서도 입지를 굳힌 그는 2007년 연극 '안나푸르나'로 데뷔한 이후 무대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렇다고 이번 '벚꽃동산'에서 발성·신체 등 자신의 장기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특성이 유약하고 시대에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합리적으로 생각 못 하는 재벌들의 현실을 부각시켜주는 촉매제 역을 한다. 스톤이 박해수를 관찰하고 그의 캐릭터를 황두식에 반영한 덕분이다. 그래서 황두식은 가장 진보적인 캐릭터지만 그가 갖고 있는 한국적 비극성 때문에 동시에 가장 고전적인 인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번 '벚꽃동산' 프로덕션의 드라마터그와 번역을 담당한 이단비 작가는 박해수에 대해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배우이다. 사이먼 연출은 그를 무대 위에 동물 같다고 표현하며 감탄했다. 그런데 무대를 압도하는 신체적 아우라와 대비되게 섬세하고 연약한 정서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박해수 배우가 연기하는 황두식을 보면 광활하고 거친 들판에 이따금 피어 있는 데이지 꽃을 발견해 가는 기분이 든다"고 봤다.

박해수는 또 '넷플릭스 공무원'에 이어 이제 'LG아트센터 공무원'이라는 별명을 달 태세다. 과거 LG아트센터 역삼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더 코러스 ; 오이디푸스'(2011)에 출연했던 박해수는 LG아트센터가 마곡으로 이전하고 제작한 대극장 연극 두 편 '파우스트'(2023), '벚꽃동산'(2024)에 연달아 캐스팅됐다.

총괄 프로듀서로 나선 이현정 LG아트센터 대표를 도와 '벚꽃동산'을 제작한 LG아트센터 신민경 프로듀서는 "황두식은 원작에서 로파힌의 변주다. 관객들에겐 쉽게 공감 얻기 힘든 밉상 캐릭터인데, 박해수는 여러 층위로 캐릭터를 이해했고, 황두식의 말과 행동이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아'라는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이 강력했다"고 톺아봤다.

또 "연기의 신이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기력은 당연하고, 프로듀서로 가장 높이 사는 박해수 배우의 가장 큰 장점은 다른 사람들의 잠재력과 에너지까지 폭발시키는 힘"이라면서 "박해수는 '동료들이 받쳐주고 있으니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된다'는 얘기를 자주 하면서 서로의 중압감을 덜었고, 마치 재즈처럼 리듬과 템포만 유지하고 매일매일 새로운 걸 해보자는 사이먼 스톤 연출가의 주문에 맞춰 매일 매일 새로운 공연과 에너지를 만들어냈다"고 부연했다.

'벚꽃동산'의 공연 첫 날 관람한 토니상 수상자인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연출가 이보 반 호프가 칭찬한 "모든 사람이 빛나는 진짜 앙상블"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스톤은 또 박해수에 대해 "무대든 스크린이든 매체를 가리지 않고 이런 최상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한국 배우들과 작업하고 싶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고 다시 그 행운을 갖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어쩌면 빠른 미래에, 박해수 배우와 영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박해수는 그저, 믿음이다. 그가 출연하는 연극이든 영화든 무엇이든 우리는 쫓아가서 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다음은 폐막을 앞둔 최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만난 박해수와 주고 받은 일문일답.



-공연을 마무리하는 소감은요.



"한 달간의 공연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랫동안 만나 기대고 살았던 것 같아요. 다른 배우들도 같은 마음이지만 많이 고마워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무대에서 이렇게 온전히 제 자신의 민낯을 보여준 것도 참 오랜만이에요. 처음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이 공허하기도 해요. 공연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후회 없이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온전히 캐릭터에 내주려고 해요."



-이번 연극에서 전도연 씨에 대한 존경을 내내 표했습니다.



"제가 전도연 선배님을 공연하면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었어요. 장시간 동안 무대 위 관객들 앞에서 눈 마주치며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해수 씨가 무대에 서봤기 때문에 든든해서 힘이 될 것'이라고 제게 말씀 주셨지만 지금까지 온 결과 본인이 든든한 선배가 돼주셨어요. 가진 아우라와 보듬어주시는 사랑의 에너지가 엄청 크신 분이죠. 송도영이 제 앞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트라우마 이야기를 할 때 이 공간에 둘만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시는 걸 볼 때면 경이로워요. 제겐 평생 잊혀지지 않는 둘만의 순간이 될 거 같아 굉장히 감사하죠. 제 초반 대사 중 '들어가도 될까요?' 다음에 '송도영이 서울로 돌아왔어. 믿을 수가 없어.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네'라는 대사가 있는데 '전도연이 (27년 만에) 연극에 다시 돌아왔다는 기분도 들어가 있어요. 그 대사를 할 때마다 매번 긴장감이 있어요."



-황두식은 어떤 캐릭터이고 어떻게 해석하려고 했습니까?



"우선 사이먼 스톤의 연출 방향성과 의도는 자유로움이었어요.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면서 나오는 사고나 순간이 되게 진실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살아있게 만들 것이라는 얘기죠. 배우한테 캐릭터 방향성에 대한 디렉션을 준 적은 없습니다. 나중에 스톤이 프로그램 북에 쓴 내용을 봤더니, 제가 생각했고 제가 살고 있었던 것과 느낌이 좀 달랐어요. 전 두식이 자체가 미래 지향적인 현실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과거의 어떤 순간에 계속 얽매여 있는 인물이라고 느껴지더라고요. 엄마에 대한 부재, 폭력성이 있었던 아버지가 날 때렸던 그 순간, 그걸 지켜봤던 흐릿한 기억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해 준 송도영을 통해 처음 느끼는 여성성 또는 사랑, 어머니에 대한 생각 그리움… 근데 그게 상처가 돼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로부터 해방감을 얻고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불쌍한 친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톤이 제일 공감한 캐릭터가 황두식이었다라고 적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도 아버지에 대한 어떤 과거의 기억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저 또한 그런 게 있죠. 과거에 아버지한테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어요. 연극을 한다고 처음 말씀 드렸을 때 '아버지의 눈빛'이 잊히지 않아요. 제가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딴따라'라는 말이 있었죠. 그 가운데 증명 받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지금은 감사하게도 아버님께서 좋아해 주시지만, 그걸 증명해내고 싶었던 아들로서 제 입장이 '벚꽃동산'을 유지하는 것과 맞물리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추억 자체가 목적성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에 두식이 변화해 (송씨 가문의 회사와 집을) 사는 건 과시적인 것보다는 '누군가는 책임져야 된다'라는 냉정함을 깔고 작동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스톤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선 연출을 줬어요. '새로운 시대가 올 거야'라는 대사를 애잔하게 친 적이 있는데 '정치인처럼 해라'고 요청하더라고요. '넌 사랑도 잃고 영혼도 다 잃었잖아. 아무 생각하지 마라'고요. 실제 그렇게 치다 보니까 더 아프더라고요."



-두식이라는 이름을 해수 씨가 제안했다고요.



"처음에 어떤 성(姓)을 제안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두식이라는 이름은 제가 지었어요. 모든 캐릭터들의 이름은 저희가 스톤과 인터뷰하면서 지어나갔죠. 처음부터 식(食)자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에 못 먹고 살면 아버님들이 지어주신 이름에 식이 들어갔잖아요. 똑똑하게 자라길 바란다면, 현(賢)자를 쓰기도 했죠. 황두식의 아버지는 두식이의 이름을 애써 짓지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이름엔 아버지의 성향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제 아들 이름 지을 때도 제 성향이 묻어나죠."



-안톤 체홉 작품은 희곡 작가 지망생 '꼬스쟈'를 연기한 '갈매기'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체홉은 어떤 매력이 있는 작가입니까?



"'갈매기'는 대학교 다닐 때만 네 번 했어요. 졸업 공연은 (안톤 체홉의 또 다른 작품인) '세 자매'였죠. '벚꽃동산'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해 너무 작업하고 싶었어요. 체홉 작품은 정말 리얼해요. 망원경으로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거 같아요. 캐릭터들이 동시다발적인데 삶 속에서 다른 친구들의 인생을 보여주는 거죠. (장면의) 점프도 있고 그 안에 간극도 있는데 '저 사람이 왜 갑자기 저렇게 변화했지?'라는 궁금증을 보여주려고 하는 거 같은데 그게 삶이기도 하죠. 특히 체홉 작품에서 갑자기 코미디가 될 수도 있고, 갑자기 비극이 될 수도 있는 부분들이 참 재밌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그 부분이 가장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깝죠. '갈매기' 연출님(오경택)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셨을 겁니다. 체홉이 어떻게 보면 막장 드라마일 수 있는데, 그 안에 내면의 겹이 있고 캐릭터엔 애정·슬픔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비웃음의 느낌이 있다고. 저 체홉 진짜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이먼 얘기에 되게 공감이 많이 가요. 사이먼이 우리나라는 '벚꽃 동산이 어울린다'고 했거든요. 인물들의 감정 기복이 논리에 맞지 않을 정도로 심해요. 그런데 지인의 장례식장에 가시는 부모님의 대화 화제가 확확 전환되는 거 보고 '체홉이 잘 어울린다' 생각했습니다."



-무대 세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배우들이 연기하시기엔 어떤 공간이었나요.



"사울 킴 무대 디자이너님이 작업하셨어요.(사울킴은 건축가로 계원예술대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활동을 많이 안 하셨었고, 외국에서 활동을 주로 하시는데 사이먼이 사울킴의 팬이에요. 연습 때부터 연습실 안에 지금의 무대 세트가 그대로 똑같이 들어왔어요. 연극은 공간의 예술이기도 해요. 처음엔 이 공간에서 '도대체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 안에 들어가서 연기를 하다 보니까 서로에게 훨씬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사이먼은 연출 의도라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지붕을 오르내리고 2층과 아래층을 각각 사용하는 인물들이 분류가 돼 있기도 해요. 송가 네 식구들 중에서 송재영(손상규), 송도영은 그 옥상에 올라가지 않아요. 욕망이 있는 변동림이나 이방인들이 그쪽을 더 많이 사용하죠. 또 높낮이의 차이로 무대를 쓸 수 있게 되니까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불안감과 에너지를 느끼게 되죠. 몸이 불안하니까 발현할 수 있는 다른 에너지들은 무대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또 방음벽이 굉장히 잘 돼 있어요. 문을 닫으면 바깥 관객들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서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더라고요."



-관객들뿐 아니라 배우들, 감독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된 연극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은 연예인, 감독님들을 많이 본 적이 없어요. 시상식보다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인사했어요. 이창동 감독님, 박찬욱 감독님, 이준익 감독님, 설경구 선배님이 관람하셨는데 '살아있는 오디션'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봤던 '벚꽃동산' 중 최고였다'는 평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해수 씨가 보기엔 이번 작품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간단히 얘기하면 상실, 사랑에 대한 얘기가 있는 것 같아요. 가족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걸 지켜내면서 미래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죠."



-소극장에서 관객 한 명 두고 공연하셨을 때를 떠올린다면요.



"절대 잊지 못하거든요. 관객 한 명과 스태프가 마름모꼴로 앉아서 공연을 봤어요. 너무 자리가 비어 있으니까 배우보다 관객이 많아야겠다 싶어서 스태프가 채운 거죠. 그 때 진짜 모든 배우들이 최선을 다해서 했고, 끝난 뒤 서로를 안으면서 수고했다고 얘기했어요. 그 때의 초심은 변하지 않았어요. 전 한 명 한 명의 인생을 살릴 수 있는 게 무대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사춘기' 작품을 할 때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관객이 객석에 계속 앉아 있더라고요. 이후 퇴근을 하는데 그 친구가 막 울면서 저한테 와서 '살 수 있는 희망을 얻었다'고 했어요. 아마 좋지 않은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나중에 제가 '유도소년'을 공연하는데 그 친구가 또 찾아왔어요. '저 기억나냐'고 물어봤는데 딱 보니까 느낌이 확 오더라고요. '그 친구가 당신이군요'라고 답했죠. 그랬더니 '대학 잘 다니고 있고 잘 살고 있다. 희망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영화, 음악, 미술이 위로와 치유가 가능하지만 연극은 직접적으로 관객이 '진짜 숨 쉬고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어 저 또한 위로를 받는 참 감사한 장르예요. 배우로서 제가 해야 할,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 초심은 항상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