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고유정(36) 사건이 대검찰청의 '피의사실 공표' 논란으로 번질 태세다.

고씨 사건과 관련해 제주지검에서는 밝힐 수 없다는 수사상의 중요 정보가 상급기관인 대검찰청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지방검찰청은 지난 1일 대검찰청과 조율된 공식 브리핑을 열고 고유정을 살인 및 사체손괴 은닉 혐의를 적용해 구속기소 하는 내용의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피의사실 공표 무서워"…앵무새된 제주 검경



제주지검은 이날 브리핑에 앞서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할 보도자료를 긴급 수정했다.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할 만한 민감한 내용이 들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공식 브리핑이 끝나고 이어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장기석 제주지검 차장검사는 "(고씨에 대한 검찰 조사 과정에서)추가로 확인된 증거가 있지만, 공소유지 과정에서 현출하겠다"며 이해를 구했다.

장 차장검사는 지난달 고유정 사건을 묻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피의사실 공표를 우려한 검찰이 지나치게 언론을 통제해서 쓸 기사 없다고 써달라"는 농담을 던졌다. '뼈아픈 농담'으로 생각해달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박기남 제주 동부경찰서장은 사건 초기 언론과 마주할 때면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해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박 서장은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면 "피의사실 공표'가 우려돼 대답할 수 없다"는 기계적인 말만 반복했다.

피의사실 공표가 그렇게 무서운 법일까. 수사기관의 공소제기 전 피의사실 공표는 형법 제126조에 따라 3년 이하 징역 또는 5년 이하 자격정지가 부과된다.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1년간 접수된 피의사실 공표 사건 347건 중 검찰이 기소된 사건은 단 한 건도 없다.

형법이 제정된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지난 66년동안 피의사실 공표로 검찰에 의해 기소돼 형사처벌을 받은 검사나 경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유정 사건에 '입 다물기'…울산 검경 갈등이 원인



고유정을 긴급체포한 지난달 1일부터 정확히 한 달간 진행된 검찰과 경찰의 이 같은 지루한 '입 다물기 게임'은 수사권 조정을 앞두고 미묘한 시기에 벌어진 울산 검경의 피의사실 공표 갈등에서 촉발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갈등은 전 울산시장 측근 비리 건과 고래고기 환부 사건으로 경찰에 자존심을 구긴 검찰이 울산 경찰의 약사면허증 위조 사건 피의자를 검찰에 송치하면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문제 삼은 것이 발단이 됐다.

울산지검은 "보도자료 내용에 유출해서는 안 되는 증거물이 담겨 있다"며 지난달 경찰 간부 2명을 피의사실 공표죄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해당 간부 2명은 2년 전 울산지검 검사가 낀 고래고기 환부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경찰관이어서 경찰 내부에서는 울산지검의 보복 수사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지난해 12월 경찰 등에 이미 피의사실 공표에 주의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며 숨겨진 의도가 없다고 반박했지만, 경찰 내부에서는 울산지검의 보복 수사로 판단하고 있다.

이 같은 갈등이 본격화하자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달 17일 기자간담회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수사기관이 다 모여서 피의사실 공표에 관한 기준을 만들자"며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울산 검경의 갈등 여파 속에서 지나친 '정보 옥죄기'에 나섰던 제주 경찰의 행보는 뜻하지 않게 '부실조사' 논란으로 번졌고, 공교롭게도 제주 동부서는 본청 수사국 소속 진상조사팀의 조사를 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고유정, 카레에 수면제 탔나…제주지검은 "No" 대검찰청은 "Yes"



지난 2일 대검찰청은 고유정이 사건 당일인 5월25일 저녁 식사 메뉴인 카레에 수면 효과가 강한 '졸피뎀'을 넣고, 전 남편 강모(36)씨를 살해했다고 언론에 확인시켜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수사결과 발표 당시 제주지검은 관계자는 "어떤 방식으로 피해자의 몸속에 졸피뎀이 투약됐는지는 향후 법정에서 다투게 될 사안이다"며 "확인할 수 없는 음식에 졸피뎀을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 바 있다.

'졸피뎀을 카레에 넣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간 뒤에도 제주지검 관계자는 "(보도는)사실이 아니"라며 "졸피뎀 투약 방법이 드러난다면 고유정의 계획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정도의 결정적 단서가 될 것"이라고 펄쩍 뛰었다. 언론 보도가 오보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대검찰청은 고유정의 사건 당일 범행 정황이 담긴 사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고씨가 자신의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에는 범행 시간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와 저녁 식사로 먹은 카레 등 많은 정보가 담겨있었다.

경찰과 검찰은 고유정의 거듭된 진술 거부에도 불구하고 휴대전화 사진을 분석해 사건 당일 범행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피의사실 공표'를 방패막이 삼아 입을 다물던 제주지검은 공소 유지에 필요한 사건의 주요 증거가 대검찰청을 통해 유출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상급기관인 대검찰청과 하급기관인 제주지검이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는 상황과 관련해 한 법조계 관계자는 "국민적 관심이 높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지나친 몸조심과 사인 미스로 수사기관이 신뢰 하락을 자처하는 꼴이 되고 있다"면서 "큰 사안에 대해선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라도 통일된 정보 제공으로 의혹 해소에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검찰은 지난 1일 살인 및 사체손괴·은닉 3가지 혐의로 고유정을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고유정이 범행 동기와 시신 유기 장소 등에 대해 진술을 거부하자 수사기간을 연장하면서 보강수사를 벌였지만, 결국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재판에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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