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땀 흘린 농부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느라고 바쁜 가을이다. 씨 뿌리고 가꾸는 자는 복이 있다. 지금 온 산하에는 오색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토양이 비옥하고 완만한 곳에 있는 나무 보다는 척박하고 비탈진 곳에 서 있는 나무일수록 선홍(鮮紅)의 핏빛 단풍으로 물든다고 한다. 시련을 받으면 생명력은 더욱 강하게 반응하고 응전하는 것은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두 같은가 보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에 ‘미당 문학제’에 참가하기 위하여 전북 고창을 다녀왔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은 질마재 단풍을 배경으로 노오란 국화꽃들이 전국에서 온 시인들을 맞이해 주었다.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이 태어나서 살다가 묻혀 있는 이곳에서 해마다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미당 선생님은 나의 첫 시집 ‘화산(火山)’에 서문과 휘호(揮毫)를 써 주시고, 1995년 3월 24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첫 시집 출판기념회에 오셔서 축사도 해 주셨다. 시 낭송과 ‘미당 시에 나타난 지역 문학적 특성’을 주제로 세미나도 열렸다. 전주에 있는 전북문학관에서 제3회 미당시 낭송 전국대회에 참석하고 올라왔다.

불타는 단풍과 국화 향기 그윽한 이 가을에 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나의 체험으로 ‘절제(節制)’를 화두(話頭)로 삼고 있다. 불교 스님(禪僧)들이 진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선(禪)을 수행할 때,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등의 화두를 자나깨나 일념으로 생각하듯이 ‘절제’를 많이 생각해 보았다. 만사에 정도(程度)에 넘지 않도록 조절하고 제한한다는 것은 시간적­공간적으로 한계 상황적 존재인 우리 인간들의 숙명이요, 본질이다. 나의 삶과 존재 전반을 성찰하고 반추(反芻)하고 음미해 볼 수 있는 좋은 화두였다.

절제는 누구나 따라야 할 삶의 지침이요, 이 세상의 진리이다. 기독교에서 즐겨 쓰는 절제를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부르고, 유교에서는 중용(中庸)이라고 부르고 있다. 나는 절제나 중도, 중용을 표현하는 용어만 다를 뿐, 큰 틀에서는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생각이나 행동이나 일이나 지나치거나 한 쪽으로 치우치면 안된다는 것이다. 좋은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자기 조절(Selfcontrol)의 절제럭을 잃어버린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들이 많다. 겉 모습은 멀쩡해도 스트레스와 크고 작은 문제들 때문에 속은 병 든 사람들이 많다.

불교에서 중도는 있음(有)과 없음(空), 괴로움(苦)과 즐거움(樂)에 빠지거나 집착하지 않는 수행 방법이요, 진리로 가는 길이다. 유교에서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중(中)’이며,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용(庸)’이다. 때와 상황에 알맞은 행위를 해야 한다는 시중(時中),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을 중시한다.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도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나는 기독교와 서양철학에서 중시하는 절제를 자동차의 브레이크로 비유해서 말하길 좋아한다. 우리의 삶에서 절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요, 본질이듯이, 자동차에 브레이크는 필수이다. 자동차를 몰고 어느 목적지에 가려고 한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엑셀도 적절히 잘 밟아야 하지만 속도를 줄이거나 자동차를 정지시키는 브레이크를 때에 맞게 잘 밟아야 한다. 브레이크를 늦게 밟거나, 밟아야 할 때에 밟지 않는다면 바로 충돌사고가 나서 목적지에 원만하게 갈 수가 없다. 엑셀과 브레이크를 때와 장소에 따라서 적절하게 잘 배합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나도, 남도 불행해 진다.

우리네 삶에서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은 절제는 더욱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의 추진에서도 엑셀과 브레이크의 지혜로운 사용이 필요하듯이,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때와 상황에 말맞은 브레이크는 절대로 필요하다. 적절한 브레이크 없는 말과 행동이 갈등과 싸움을 가져온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브레이크 없는 말과 행동은 아픔과 이별을 가져온다. 지혜로운 브레이크 없는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불행을 가져온다. 이기적인 말과 행동은 불통과 절망을 가져온다.

특히 가까운 가족, 친구, 연인들은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가까이 있기에 상대방의 부족함도 잘 보이고 잘 알게 되기 때문에 자칫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기 쉽다. 말이나 행동도 한 번 뱉어 버리면 쏟아진 물처럼 다시 담을 수가 없다. 한 번 받은 상처도 좀처럼 지우기가 쉽지 않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연인에게서 상처를 받고 평생 속으로 괴로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 돈)가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 세상에 살고 있지만, 더 중요한 삶의 가치들도 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속담은 옳은 말이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사랑하는 사람이 브레이크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여 아픔과 불행을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옛 성인은 ’하루에 세 번은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一日三省)‘고 했다. ’엷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세상을 조심하면서 살아야 한다(여리박빙, 如履薄氷)고 강조했다. 때와 상황, 관계에 알맞게 브레이크를 지혜롭게 사용하여 단 한 번 뿐인 인생이 성공한 삶,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김윤호 주필 / ihon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