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가 다 지나갈 무렵인 12월 28일, 한국과 일본 외교장관이 24년 동안 전 세계의 이목을 끌어오면서 힘든 싸움을 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최종적?불가역적(不可逆的) 합의’를 했다. 다시는 거론하지도 말고(최종적), 뒤집을 수가 없이 완전히 확정적(불가역적)이라는 좀 어마어마하기도 하고 좀 무시무시하기도 한 합의이다. 이 굳은 맹세와 약속을 영원히 변치 말고 지키자는 피로 쓴 혈서(血書)처럼 신성스러운 기운까지 느껴진다. 시간은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은 불가역적이다’고 들었는데, 오랜 만에, 또 엉뚱한 곳에서 ‘불가역적’이라는 말을 들어서 생경하고 낯설다.

국회의 동의를 받은 국가 간의 조약도 시간이 흘러서 정세가 변하거나 국민들의 여론이 변하면 수정되거나 폐기되는 사례도 많다. 이번 일본군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 합의는 결론부터 말하면 절차적 정당성도 없고, 내용도 피해자의 의사는 완전히 무시되고 가해자의 요구대로 들어준 굴욕적인 합의로서 원천 무효이다. ‘정치적 선언’으로서 언제라도 어느 정권이던지 재논의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가역적(可逆的)이고 가변적(可變的)인 합의이다. 더 이상 불필요한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를 하기 전에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나라 잃은 식민지, 힘없고 슬픈 백성의 딸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조선의 소녀들이 식민지배 간악한 일제와 일본군의 강제 동원에 의해서 중국으로, 대만으로, 필리핀 등으로 끌려가서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참담한 ‘성(性) 노예’ 생활을 했다. 인간 이하의 노예로서 도중에 죽어도 그만인 고통과 절망 그 자체였다. 종군 위안부는 무려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힘없고 약해서, 우리 선조들이 정치를 잘 못해서 죄 없는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끌려가서 당한, 참으로 아프고 눈물겨운 역사이다.

생존자들이 증언했듯이 잔혹한 성노예 시스템의 대상은 어른들이 아니라 13세, 14세의 소녀들이었다. 짐짝처럼 배에 실려 아시아 각지의 전쟁터로 끌려가서 매일같이 강간을 당한 소녀들은 초경조차 치르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일본의 행위는 전쟁범죄일 뿐만 아니라 어린이에 대한 인신매매와 성범죄였다. 이러한 사실들이 일본의 교과서에 기술되고 서방 언론들이 보도하지 않는 한 희생자를 위한 진정한 정의는 이뤄지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군이 수많은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성 노예를 강제한 범죄행위에 대한 일본의 명백한 국가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일본은 전후 독일처럼 국가적인 범죄사실 인정과 서죄, 법적 손해배상과 책임자 처벌 등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12·28합의에서는 이같은 사실이 명확하게 인정되어 있지 않다. 범죄행위에 대한 법적 배상이 아니고, 위로금이나 지원금 성격의 10억 엔(우리 돈 약 98억 원)을 출연하고, 전제 조건으로 한국 정부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되어 있는 종군 위안부를 기리는 ‘소녀상을 이전하기로 노력한다’고 발표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전 새정치민주연합)과 시민단체들은 ‘굴욕적인 합의는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한일 위안부 합의문은 인권을 경제와 외교 논리로 환치했다. 역사와 인권에는 최종적 불가역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과오를 범한 사람은 죄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죄로 인한 손실의 배상을 통해서 참된 정의와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여기에서 용서와 화해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법적 책임에 대한 언급이 되지 않은 사과로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경제적 지원에 대한 언급이 먼저 나와 피해자들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정의평화위원회는 양국 외교기관을 통해 발표된 이번 합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양국의 의회 차원에서 추진된 결의문 채택과 관련법 통과가 아닌, 외교기관의 합의문 형태로 소통의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합의문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종군 위안부는 일본이라는 한 국가에 의한 조직적 인권말살 행위로서, 인류에 대한 중대한 범죄로 피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하는 것은 인류의 양심과 역사적 경험을 거스르는 위험한 도전이다.

사전에 한 마디 의논도 없이 합의를 한 후에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나눔의 집’에 찾아간 외교부차관에게 할머니들은 ‘당신들은 어느 나라 외교부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합의할 수 있느냐.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 우리를 두 번, 세 번 죽이지 말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외교부차관은 ‘(대통령의) 지침에 따랐다. (연말연시) 연휴라서 시간이 촉박해서 사전 의논을 못드렸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돌아갔다. 대학생들은 주한 일본대사관을 찾아가서 항의시위를 하다가 잡혀가고, 한 겨울 추위 속에서 소녀상 앞에서 철야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외대, 이화여대 총학생회도 위안부 합의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나는 찾아간 때는 오래되어 잊었지만,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수요집회’에 혼자서 찾아가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제야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요’하고 땅바닥에서 무릎 꿇고 큰절을 올리고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일을 신문 칼럼으로 쓴 기억이 있다. 국민을 무시하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것처럼 이번 위안부 합의는 국민 정서와 역사적 정의, 인류 양심에 반하는 ‘오만한 권력의 횡포’다.

김윤호 주필 / ihon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