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고향 영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광주를 거쳐서 보성군 벌교읍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가로수 잎새들이 많이 떨어지고 빈 나뭇가지 맨몸으로 서 있는 11월 하순 늦가을 하늘은 구름이 끼어서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다. 빈 들녘에는 나락들이 모두 거두어지고 봄의 부활을 위하여 추운 겨울을 이겨낼 긴 겨울잠을 준비하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벌교읍 버스터미널 뒤쪽 야트막한 산허리에 지어진 태백산맥문학관은 부용산과 제석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유명한 벌교 꼬막이 올라온 점심을 잘 먹고 벌교읍장실에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과의 티타임을 가졌다. ‘조정래 작가와 함께 하는 이야기 한마당, 독자가 묻고 작가가 답하다’에 초청된 12명은 조정래가 지은 대하역사소설 ‘태백산맥’ 10권을 읽거나 10권을 전부 연필이나 볼펜으로 필사(筆寫)한 열혈 독자들도 있었다. 울산에서 온 중학교 2학년 박성열군은 가장 어린 학생으로 태백산맥을 모두 읽고 작가로부터 편지를 받은 학생이었고, 전국에서 선발된 질문자들이다.

벌교읍장실에서의 30분 짧은 티타임에서도 조정래 선생은 대단했다. ‘인생은 징검돌 두 개를 갖고 앞 물 속에 하나씩 놓으며 하천을 건너가는 길이다’, ‘인생은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해 가는 길이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시원하고 명쾌한 인생론이다. 오래 전,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국작가회의 모임에서 두어 차례 뵙고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니 참으로 대단한 작가라는 것을 실감했다. 1943년생이니까 우리 나이 73세인데, 그는 이미 문학 9단, 인생 9단이었다. 문학과 인생의 놀라운 달관자 였다.

오후 2시부터 벌교읍 채동선음악당에서 열린 ‘조정래 작가와의 이야기 한마당’은 방송대 부산지역 국문학과 학생들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온 350여명의 팬들로 만원을 이룬 가운데 진행되었다. 채동선실내악단의 연주에 맞춘 ‘부용산(芙蓉山)’ 노래가 청중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요절한 누이를 그리며 쓴 시 ‘부용산’이 빨치산들이 불렀다고 ‘빨치산의 노래’가 됐다는 이유로 평생을 쫓기고 매 맞고 천대받다 끝내 혈혈단신 이역만리 땅 호주로 떠나야 했던 시인 박기동은 번번이 원고를 압수당해 아직껏 단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당시 목포 항도여중 국어교사였던 박 시인이 쓴 아름답고도 슬픈 시 ‘부용산’을 소개한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 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 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1절) //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서 있으니 /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2절)

12명의 질문자들의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한 작가와의 이야기 한마당은 조정래 선생의 부드럽고도 거침없는 사자후(獅子吼)였다. 조정래 선생의 이야기 내용을 요약해 본다. 문학은 상징과 생략이 생명이다. 피와 민족이 이데올로기 보다 강하다. 살아서 빨치산이지 죽어서도 빨치산이냐. 빨치산도 우리와 똑 같은 희노애락을 가진 인간이다. 소설은 인간탐구이다. 법일 스님은 순천 선암사 스님이었던 아버지, 김범우는 작은 외삼촌, 조원제는 조선대 박현채 교수가 모델이다. 1953년 피난온 곳이 벌교였는데, 초등학교 친구 아버지 빨치산을 죽여서 시체를 토막내서 초등학교 운동장에 놓아 두었다. 직접 목격하고 무서워서 공포심에 오줌싸개를 차고 학교를 다녔다.

우리는 운명적?숙명적?필연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인 반도에 태어나서 죽어가는 슬픈 사람들이다. 이념을 넘어서 인간을 위하여 문을 열어 놓은 것이 ‘태백산맥’이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풍요롭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파괴하고 살육하는 것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인간이 이데올로기 보다 강하다. 1994년 국가보안법 이적 표현물로 고발당해서 2005. 3. 31. 노무현 정부 때 무혐의를 받았는데, 조사받는 동안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을 수없이 보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다.

친일파의 99%는 自然死했지만, 연좌제(連坐制)가 없기 때문에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하고 있다. 아직도 친일 청산이 안 되고 있다. 나는 국민들의 지성을 믿는다. 국민들의 역사의식 회복이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앞으로 국민들이 똑똑해지면 불법과 불의와 횡포가 많이 나아질 것이다. ‘태백산맥’10권을 5공화국 말기 1983년 40세에 집필을 시작해서 1200여명의 인물을 만들어서 46세에 완료했다. 대한민국이 다 잘 하는데, 정치가 제일 골 때린다. 정치를 없애 버릴 수도 없다. 국회의원 월급과 각종 특권을 없애버려야 밤낮 싸우는 당내 투쟁과 국회 싸움이 없어질 것이다.

‘태백산맥’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냐는 작가의 질문에 청중들은 맞추지 못했다. 작가가 말하는 주인공은 마지막 부분,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 해방’은 실패했지만, 염상진을 추종하면서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에의 결의를 다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 하대치와 외서댁, 두 사람이다. 가난과 이념, 제도와 편견, 지역과 인종 등 수많은 굴레와 구속을 훌훌 벗어버리고 참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는 ‘인간 해방’은 우리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지 모른다.

김윤호 주필 / ihon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