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럭시냐, 아이폰이냐, 옵티머스냐'의 갈등은 차라리 단순한 편에 속한다. 올해 새 차를 산 소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갈수록 공세가 거세지는 수입차 업체들은 올 한 해 80종이 넘는 신차를 쏟아냈다. 이들로부터 안방을 사수하려는 국내 브랜드도 많은 돈을 들여 대대적인 마케팅 활동을 벌였다.
2012년의 끝을 보름 앞두고 올해 신차 판매 성적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11월까지 집계치로 가장 많이 판매된 차는 현대 아반떼였다. 총 10만대 가까이 팔리면서 국내 준중형차의 지존다운 아성을 지켰다. 기아 모닝(2위)과 레이(8위), 한국GM의 스파크(6위)도 선전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작고 연비 좋은 경차의 선호도가 높아진다는 공식이 이번에도 증명됐다.
쏘나타와 그랜저, K5 등 현대·기아의 대표 중형·준대형차들이 3~5위, 스포티지R·투싼ix 같은 2000㏄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도 나란히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수입차 중엔 역시 디젤이 대세였다. BMW 520d가 수입차 전체 1위, 같은 회사의 320d(4위)나 폴크스바겐 티구안 2.0 TDI(5위), 골프 2.0 TDI(6위), 아우디 A6 3.0 TDI 등 수입차 모델별 판매 톱10 안의 6종이 디젤이었다.
선택지가 넓어진 만큼,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받지 못해 슬프고 억울한 차들도 속출했다. 본지 자동차팀이 올해 또는 지난해 하반기 출시된 신차 중에 '알고 보면 내공이 있는 아쉬운 차들',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해 슬픈 차들'을 꼽아 이유를 분석해봤다. 새해에는 이들도 선전할 수 있을까.

◇차는 좋은데 너무 비싸서…

올해 기아차 K9만큼 화제가 된 차도 없다. 기아차가 역대 가장 많은 투자비를 들여 자존심을 걸고 개발한 본격 대형세단인 데다, 수입 중·대형 세단의 텃밭인 5000만~8000만원대 고급세단 구매층을 노린 차이기 때문이다. 인기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 부사장이 지휘한 'K시리즈'의 완결판이라는 점에서도 세간의 관심은 특별했다.
차 자체는 훌륭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현대·기아차가 독자개발한 후륜 8단 변속기에, 제네시스로 이미 검증받은 3.3L·3.8L급 직분사 엔진이 조화를 이뤘다. 국산차로선 처음 시도된 후측방 경보시스템과 헤드업디스플레이 등 화려한 첨단 기능도 대거 장착됐다. 하지만 역시 브랜드 이미지 대비 높은 가격이 소비자들의 구매를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게 했다. 내년에는 가격을 조정한 세부 모델이 출시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현대차 i40는 '본격 왜건시대'를 열 선두주자로 기대를 모았다. 쏘나타의 뼈대를 차용했지만 트렁크 공간 활용도를 높인 유럽형 디자인으로 완전히 다른 버전으로 재탄생했다. 1.7L급 디젤 모델(i40 살룬)은 수입 해치백이나 수입 왜건에 마음이 흔들린 소비자들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란 예상도 있었다.
하지만 i40 살룬까지 합친 i40 전체 판매량은 쏘나타의 10분의 1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밀물과 썰물이 만나듯 국산차와 수입차 상품군(群)이 만나는 '마(魔)의 3000만원' 가격대에 딱 걸려 어정쩡한 위치가 되고 말았다. 개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날수록 인기도 차차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GM의 쉐보레 캡티바 2.0은 너무 센 경쟁자들을 만나 존재감이 희미해진 비운의 차다. 한국GM의 대표 SUV로, 종전 2.4L급 엔진을 없애고 소비자들의 인기가 많은 2.0L를 추가했다. 예전 대비 소음이 개선되는 등 장점이 많아졌지만 현대·기아 SUV들에 밀려 고전했다.

◇아직 때가 아닌가 봐요…

수입차 중에선 때를 잘못 만나서, 또는 편식 위주의 한국 소비자 입맛 때문에 유독 관심을 받지 못한 차들도 속출했다. 86(하치로쿠)는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운전의 재미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초봉으로도 사서 탈 수 있는 실용적인 스포츠카'를 표방하며 내놓은 차다. 유명 만화 '이니셜D'에 등장하는 AE86을 현실화한 차로 더 유명하다. 저(低) 중심 설계가 특징인 스바루 수평대향 엔진을 달아 운전하는 맛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가난한 자의 스포츠카'라는 별명 때문인지, 독일 수입차 일변도인 한국 소비자의 취향 때문인지 판매대수는 80대로 저조한 편이다. 그나마 이 중 70%가 수동변속기 모델이다. 자동변속기 모델보다 790만원이나 싼 덕분이기도 하지만, 운전의 손맛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얘기도 된다.
프랑스 브랜드 시트로엥은 한국 출시 첫해를 녹록지 않게 보냈다. 독특한 디자인이 특장점인 소형차 DS3와 DS4를 들여오면서 '프랑스 프리미엄'을 기대했지만, 소비자들은 아직 영 어색하다는 반응이다. 남다른 내·외관과 높은 연비 덕분에 유럽에선 확고한 구매층이 있지만, 국내에선 자리를 잡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형제 브랜드인 푸조의 저조한 판매 성적이 말해주듯, 독일 업체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골프와 티구안 등을 앞세워 중소형 디젤차 열풍을 주도하는 폴크스바겐에도 '아픈 자식'이 있었다. 바로 고급 SUV 투아렉. 한때 잘나갔던 투아렉은 지난해 말 디자인 변경 모델을 내놓으면서 오히려 판매가 더 저조하다. 수익성 좋은 고급차인데 올 들어 350여대 남짓 팔리는 데 그쳤다. 같은 플랫폼을 쓰는 포르쉐 카이엔의 절반 수준이다. 폴크스바겐은 "포르쉐보다 1000만원 이상 싸다"는 점을 알리고 싶지만, 오히려 이 점이 독이다. 소비자들 귀에는 "1000만원 정도만 더 주면 포르쉐를 살 수 있다고?"로 들릴 수도 있다.
렉서스의 주력차, 신형 ES도 안타까운 신차로 꼽힌다. 9월 출시 이후 1250대가 판매됐는데 예상치를 밑돌고 있다. 확 넓어진 실내, 젊어진 디자인 등 장점이 많지만 과거 '강남 쏘나타'로 군림하던 몇 년 전에 비해 고급 브랜드로서의 인기가 낮아진 모습이다. 하지만 복합연비가 16.4㎞/L에 육박하는 ES 300h(하이브리드) 모델이 ES 350 가솔린 모델보다 오히려 100만원 싸다는 점이 소비자들에게 속속 알려지면서 실지(失地) 회복을 노리고 있다.

호남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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