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지만 희망은 보였다. 승부조작 파문으로 인한 전력 공백 속에서 감격의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룬 KEPCO의 마지막 투혼은 박수를 받아 마땅했다.
KEPCO는 27일 오후 수원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현대캐피탈과 NH농협 2011~2012 프로배구 V리그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세트스코어 1-3(18-25, 25-20, 20-25, 20-25)로 졌다. 25일 열린 1차전에서 세트스코어 0-3으로 완패한 KEPCO는 3전 2선승제로 치러진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로 주저 앉으며 시즌을 마감했다.
결과를 떠나 과정이 아름다웠다. 맥없이 무너졌던 1차전에 이어 2차전에서도 KEPCO의 완패는 기정사실화 돼 있었다. 승부조작 직격탄을 맞고 주전 선수들이 대거 빠진 전력으로는 강호 현대캐피탈에 맞서기 버거웠다. 그러나 벼랑 끝에 몰린 선수들은 불같은 투지를 보였다. 첫 세트를 18-25로 맥없이 내주는가 싶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듯이 2세트를 따 내며 현대캐피탈을 몰아붙였다. 비록 3,4세트를 내리 내줬지만 팽팽한 경기를 이어가며 홈 팬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았다.
경기를 마친 KEPCO의 신춘삼 감독의 표정은 밝았다. 패배 속에서도 오히려 목소리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신 감독은 "난파되는 배의 동력을 잃지 않기 위해 조정간을 잡는 선장의 마음으로 시즌에 임했다"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4강이란 목표를 이뤄냈다. 이를 헤쳐 온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생각한다. 결승은 못 갔지만 꿈을 갖고 아름답게 물러난다"며 다음 시즌을 기약했다.
KEPCO의 올시즌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았다. 시즌 초반까지 '원조 괴물' 안젤코를 앞세워 삼성화재와 선두 경쟁을 펼쳤다. 그저 '반짝 돌풍'은 아니었다. 치열한 2위 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을 만큼 탄탄한 전력을 과시했다. '만년 하위' KEPCO로선 꿈 같은 시즌 초반이었다. KEPCO는 전신인 한국전력을 포함해 프로 출범 이후 지난 7시즌 간 최하위만 3번이나 기록한 V리그의 대표적인 약체였다. 승률이 1할대에도 못 미치던 시즌(2005~2006시즌, 0.086)도 있었다. 승리보다 패배가 두 배나 많았던 2010~2011시즌 10승20패가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승승장구하며 4강 포스트시즌 진출은 무난해보이던 KEPCO는 지난 2월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승부조작 파문으로 주전급 선수 4명을 한 순간에 잃었다. 이후 7연패에 빠지며 5위 드림식스의 추격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주전급 세터 2명이 빠진 공백으로 조직력이 크게 흔들렸다. '루키' 서재덕의 부상 장기화로 안젤코 홀로 떠안은 팀 공격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천신만고 끝에 프로 출범 이후 처음으로 준플레이오프행 티켓을 거머쥐었지만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KEPCO의 돌풍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선수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선수들의 정신력 만큼은 챔피언결정전에 나서는 강팀의 면모와 다를 바 없었다. 경기를 마친 현대캐피탈의 하종화 감독도 "마지막까지 KEPCO가 열심히 해준 것에 대해 배구인의 한 사람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며 박수를 보냈다.
일정을 모두 마친 KEPCO는 새로운 시즌을 준비한다. "다음 시즌에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 강조한 신 감독의 말에는 벌써부터 다음 시즌을 향한 투지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구멍난 선수층을 메우고 팀워크를 재정비해 올시즌 돌풍을 재현하겠다는 각오다. 다음 시즌부터 준플레이오프가 폐지되는 만큼 삼성화재와 대한항공, 현대캐피탈로 이어지는 '3강 구도'를 깨는 것이 KEPCO에 주어진 새로운 숙제다. 신 감독은 "감독과 선수, 프런트 모두가 힘을 합하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즌이었다는 점에서 희망을 발견했다"며 더 나은 내일을 기약했다. 승부조작의 아픔을 털고 재도약에 나선 KEPCO의 비상을 지켜보는 일도 다음 시즌 V리그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전망이다.

호남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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