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느 민족 못지않게 가을을 좋아한다. 아침, 저녁 소매 자락에 스치는 바람결도 시원하고 청자 빛 하늘은 더욱 높아만 보인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가을에 풍족히 거둔 농산물로 조상님께 감사하는 ‘한가위’는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올 여름 그 지긋지긋한 폭염은 가실 줄을 모르지만 이내 드높고 파란 가을 하늘이 펼쳐질 것이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나온 추석 풍경을 묘사한 글이다. 그러니까 첫 머리는 1897년의 한가위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에서 달과 가장 친근한 나라를 들자면 어떤 민족도 우리를 앞설 수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 빛을 발하여 은둔자의 자세를 지닌 달은 옛 사람들에게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슬픈 날 바라보는 달은 슬픔을 위로해 주고, 보고픈 이가 그리운 밤에는 그의 얼굴이 되어 주기도 했던 친구와 같은 달이다.

또 오랫동안 우리의 소망을 빌ㅇ었던 달은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제 과학의 발달로 달과 교교(皎皎)한 그 빛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다운 한가위 풍속만큼은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그래도 녹록지 않은 세상에서 모처럼 근심을 내려놓고 그리운 이들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한가위는 여전히 축복의 사간일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황금연휴에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끼어있어 고향을 찾는 귀성객은 예상을 뛰어 넘을 것 같다.

하늘이 청명하다. 온 산천이 푸르르다. 햇살도 따갑다. 힘들게 여름을 버텨온 황금벌판… 벼들도 햇살을 더 받으려는 듯 키를 쑥쑥 높인다. 한가위에는 굶주리는 개도 없다고 한다. 그만큼 먹을거리가 풍성하고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이 아니던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참으로 정감이 넘치는 그리고 풍요로운 말이다.

아직도 한 낮의 따가운 폭염을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그런데도 추석은 벌써 코앞이다. 어렵기 만한 경제에 선물 꾸러미가 가벼워질 고향길, 그만큼 발걸음은 무겁기만 할 것이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이고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한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속담 중에 “일년열두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도 생겼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팔월 한가위야말로 일년 중 가장 풍요로운 날이요, 설과 더불어 큰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또 우리네 세시 풍속의 하나로 ‘아홉 차례’라는 말이 있었다. 이처럼 십 분을 다 채우지 않고 조금은 모자라게 사는 구분철학(九分哲學)은 우리 한국인이 터득하고 살아온 처세철학이다. 밥은 많이 먹지 말고 세력은 남김없이 부리지 말며 말은 하고 싶은 대로 다하지 말고 복은 남김없이 누리지 않는 것이 화를 멀리하고 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인생에 있어 욕심이나 돈, 권력, 명예 등을 적정한 선에서 자제해야지 가득 채우려 하면 무(無)로 돌아간다는 구분철학의 구현인 것이다.

바쁜 일정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고 각박해지는 때일수록 모두들 고향으로 내려가 어른들을 찾아뵙고 차례를 지내며 정을 나눠야 한다. 한가위는 그동안 삶의 현장에서 뽀얗게 쌓인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마음을 맑게 닦아내는 날이다. 가족들의 정으로 마음을 위로받고 다시 기운을 채우는 재충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가위 날 조상숭배와 부모님을 찾아뵙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점점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향로(香爐)의 연기가 가물거리는 차례상,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자손이 없다면 부모님들은 얼마나 쓸쓸하고 섭섭하겠는가.

올 추석에는 고향을 찾아 노부모님의 풀기 없는 손을 잡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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