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틀 속에서 지내다 보면 산에 가기가 쉽지 않다. 날마다 할 일이 있고 주말이나 일요일에도 갈 곳이 있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모두가 바쁘고, 시간의 여유도 없지만, 마음의 여유는 더 없다. 그래서 혼자서 산에 가는 것은 쉽지 않고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가족도 각자 할 일이 있고 처지가 있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쉬운 선택이 자기가 속한 단체에서 가는 산행에 동참하는 일이다.

지난 토요일, 성균관대 총동창회와 성균관대 법대·로스쿨동창회가 주최하는 ‘20회 성균가족등산대회’에 참가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산행에 알맞은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신분당선 청계산입구역에서 내렸다. 오랜 만에 만나는 선후배들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서울시 서초구 남쪽에 있는 청계산이수봉(二壽峰)을 향하여 출발했다.

청계산은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 성남시와 과천시, 의왕시의 경계를 이룬다. 청계산이라는 이름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淸溪)'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조선시대에 푸른 색 용이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두고 청룡산이라고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청계산은 남북으로 길게 능선이 이어지는데 주봉인 망경대(望景臺: 618m)를 비롯하여 옥녀봉(玉女峰 375m)·청계봉(582m)·이수봉(545m) 등의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망경봉은 고려가 망하자 충신이었던 조윤(趙胤, 후일 이름을 조견(趙狷)으로 바꿈)이 청계산 정상에서 북쪽 고려의 수도인 송도를 바라보며 세월의 허망함을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수봉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된 정여창(鄭汝昌)이 이곳에 숨어 위기를 두 번이나 모면하였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추사 김정희는 청계산 옥녀봉 북쪽 자락에 초당을 짓고 살았다. 서쪽에 관악산(冠岳山 : 632m), 남쪽에 국사봉(國思峰: 538m)이 솟아 있으며, 이들 연봉과 더불어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룬다.

가파른 산길을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오르니 이마와 얼굴, 등허리에 땀이 흠뻑 젖는다. 운동이 되라고 평소 시내를 다닐 때에도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다. 청계산입구역 부근 출발지에서부터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숨을 몰아 쉬며 오르니, 오랜 만에 등산다운 등산을 하는 것 같았다.

목적지인 이수봉까지는 3,6km 산길이다. 봄 여름, 그토록 푸르른 나무 잎새들이 벌써 낙엽이 되어 수북이 쌓인 산길을 오르는 일은 번잡한 세상사에서의 휴식이다. 일상에 매몰되어서 잊고 지내기 쉬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자기 성찰의 소중한 시간이다. 함께 오르는 사람이나 내려오는 모르는 사람들도 모두 정다운 눈길과 인사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곳이 산행 길이다. 산은 사람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드나 보다. 그래서 옛부터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인자요산 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지자요수 知者樂水)고 전해 지고 있다.

이수봉 정상 못 미쳐서 잠깐 땀을 식히고 정상에 올랐다. 산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목적했던 산의 정상을 모른다는 것은 기쁨과 성취감이 있다. 산을 오를 때는 만인이 평등하다. 자기 체중을 지탱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발로 걸어가야 한다. 자기 건강 상태도 거짓없이 바로 드러난다. 누가 힘 센 사람이 업고 갈 수도 없고, 편법이나 반칙으로 올라갈 수도 없다. 올라가지도 않고 올라갔다고 속이거나 우겨댈 수도 없다. 산은 평등과 정직, 남에 대한 배려와 인간애를 가르쳐준다. 위선이나 궤변, 이기심은 바로 탄로나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린다.

산에서 내려오는 하산길은 많은 교훈을 준다. 몸무게가 다리에 무겁게 가감없이 실려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쉽다. 건장한 남자들도 자칫 발목이 접질러져서 자기 발로 내려오지 못하는 고통의 길이 되기도 한다. 스산한 가을 바람에 흩날려서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 안간힘으로 진홍의 핏빛 단풍으로 비탈에 서있는 나무들을 볼 때는 아름다움 보다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경사가 완만한 곳 보다도 가파르고 척박한 비탈에 서있는 나무들이 생명의 반발력 때문인지 더욱 선명하고 더욱 고운 단풍으로 물든다고 한다.

우리 인생도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두 언젠가는 저 낙엽처럼 떨어져서 흙 속에 묻혀야 한다. 인생의 하산길도, 정치의 하산길도, 만남의 하산길도 조심하고 절제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을산 하산길은 내려놓고 비우는 삶의 근본, 삶의 철학을 일깨우는 길이다. 오늘 하루를 깊이 감사하면서 삶의 둥지를 찾아서 돌아왔다.

김윤호 주필 / ihona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