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와 ‘테오도르 루즈벨트’처럼
임성욱 시인·사회복지학박사 입력 : 2019. 06. 03(월) 16:14
바흐의 마태수난곡. 복음서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을 다룬 종교 음악이다. 1729년 4월 15일 초연되었다. 그 후 까마득히 잊혀졌다. 그러다가 1829년 펠릭스 멘델스존에 의해 발굴되고 초연되었다. 멘델스존은 독일의 초기 낭만파 시대의 작곡가다. 피아니스트이자 오르가니스트다. 지휘자이기도 했다. 바흐나 멘델스존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음악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중·고교 시절 교과서에서 많이 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가 처음부터 대음악가로 추앙받은 것은 아니다. 대음악가 반열에 올라선 것은 사후인 19세기다. 그야말로 100여년이 지난 뒤다. 때문에 생전에는 큰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저 음악이 좋아서 빠졌을 뿐이다. 장인의 정신으로. 알아주든 않든 간에. 이게 진정한 전문가 정신이 아닐까. 어찌 보면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100여 년 뒤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대중의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감동을 주고 있다. 요즘의 촐싹거리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아마도 복장 터져 죽을 일일지도 모르지만. 작금의 세태는 참으로 가관이다. 쪼그만 재능만 있어도 난리다. 안달이다. 타인이 보기엔 그저 풋내기일 뿐인데도. 감으로 말하면 겨우 6월 초순경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때는 떫은맛도 제대로 들지 않을 시기다. 그런데도 매우 달다고 우겨대면 될까. 그야말로 공해가 아닐 수 없다. 예술계 쪽만 이러는 것은 아니다. 정치계도, 교육계도, 기타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즘 정치인들을 봐보라. 참으로 가관이다. 철면피다. 자신들의 말을 빌리자면 사이코패스다. 날마다 독설을 난무한다. 그러면서도 국민을 위한단다. 국민의 이름을 너무도 많이 도용하는 것 같다. 자신의 하찮은 것은 침소봉대해도 타인의 재능은 아무리 높아도 묻어버린다. 헐뜯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갑남을녀도 마찬가지다. 주변에서 가장 미움 받는 부류들은 정해져 있다. 제멋대로인 사람, 돈 버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 사람, 화제가 직장 이야기밖에 없는 사람, 수다스러운 사람 등이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남의 이야기는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도 인지하지 못한다. 때문에 인정하지도 않는다. 철면피 스타일이다. 반면에 환영받는 사람들은 어떤 쪽인가. 정직한 사람, 겸손한 사람, 인생에 적극적인 사람 등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을 잘 내세우지 않는다. 헐뜯지도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지도 않는다.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일에 몰두한다. 이런 부류의 대부분은 자신이 잘못한 것은 스스로 인정한다. 그래서 고쳐나간다. 때문에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좋아한다. “위대한 사람은 평론가가 아니다. 관중석에 앉아서 선수가 뭘 어찌했고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는지 지적하는 그들이 아니다. 영광은 먼지와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자의 몫이다. 앞서면 이길 것이요, 뒤지면 패할 것이다. 그러나 실패하고 패배했다 해도 그는 담대하고 위대하게 진 것이다. 경기장 안에서 담대하게 뛰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미국의 26번째 대통령이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가 한 말이다. 심장이 좋지 않아서 대학시절에 의사의 강력한 권고도 받았다. 조심조심 살라고. 하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았다. 곰 사냥을 즐기면서도 임신한 곰, 병약한 곰 등을 가려서 했다. 인간적인 면이다. 바흐처럼 소신껏 충실하게 이행했던 것이다. 주어진 사명감을.
임성욱 시인·사회복지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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